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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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8월29일 국행수륙대재 초재 법문
종범스님 2021-08-29
오늘은 신축년 진관사 수륙대재에 수륙재 법문을 하러 왔습니다. 초하루 법문도 하러 오고, 수륙재 법문도 하러 오고 이제 종종 와요, 종종 와. 불교에 조상천도재(薦度齋), 생전예수천도재(生前預修齋), 수륙대재(水陸大齋)천도재, 이런 중요한 천도재 의식이 있는데요. 유정설법(有情說法)은 살아 있는 중생들에게 설법하는 것은 교화(敎化)라 그러고, 유정설법 자비교화, 그다음에 사후 천도, 사후에 교화하는 것은 교화라고 안 하고 천도라고 해요. 생전 교화는 교화고, 사후 교화는 천도다. 그러면 천도라는 것은 조상 천도나 예수재 천도나 수륙재 천도나 다 같은 건데, 천자가, -진공, 진언이란 말이 있는데. 진공, 공양을 올린다는 뜻이에요. 말을 올릴 때 진언(進言)이라 그러고, 나아갈 진자, 말씀 언자, 진언을 한다, 또 공양물을 올릴 때 진공을 한다. 그게 다 올린다는 말이거든요, 나아갈 진자가. 그다음에 바칠 헌자가 있어요. 헌공(獻供)이라고 그래요. 봉헌삼보전(奉獻三寶前), 삼보전에 봉헌한다.- 이 올릴 천(薦)자, 천자는 나아갈 진자와 바칠 헌자,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어요. 진공을 천이라고 하고, 헌공을 천이라고 한다. 그래서 잘 올려서, 잘 바쳐서. 도(度)자는 제도할 도자인데, 인도할 도자와 마찬가지예요, 인도(引導). 돌아가신 영가들에게 잘 올려서 극락세계로 인도한다. 그게 천도죠. 첫 번째는 잘 올려야 돼요. 그래서 어떡하냐. 죽음이 없는 극락세계. 죽음은 생각에서 나온 건데, 생각이 맑아지면 죽음은 없어요. 그래서 한 생각 돌이켜서 죽음의 괴로움에서 죽음 없는 극락세계로 가시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게 천도예요. 그런데 예수재는 생전에 미리 하는 게 예수재고, 조상 천도는 후손이 천도하는 게 조상 천도라. 이런 것은 다 그 영가를 담당하는 주인이 있다고 해서 유주고혼(有主孤魂)이라고 그래요. 있을 유자, 주인 주자. 유주라는 말은 복위자(伏爲者)가 있다 이거죠. 복위, 정성을 올리는 사람. 그래서 아무개 복위. 근데 무주고혼(無主孤魂)이 있는데, 무주고혼은 복위자가 없어요. 누가 천도를 하는지 누가 제사를 올리는지 아무개 복위, 정성을 올리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성 올리는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영가를 무주고혼이라, 주인 없는 외로운 혼이다 이래요. 그래서 수륙재는 전부 무주고혼을 위한 천도재예요. 예수재하고도 다르고 조상 천도하고도 달라요. 무주고혼. 그래서 개인이 하기가 힘들어요. 그래가지고 옛날부터 나라에서 주관을 했어요. 그래서 국행수륙대재라고. 무주고혼이 한, 둘도 아니고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어서 아주 국가적으로 하는 행사가 돼야만 원만한 수륙재가 된다, 그래서 국가에서 주도로 하는 수륙재가 많았는데 그걸 국행수륙무차대회(國行水陸無遮大會)라고해요. 무차(無遮)라는 것은 아무 막는 일이 없다. 막을 차자인데 다 참여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수륙재에 대한 의미 간단히 말씀드리고 이제 영가를 청해서 법문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今年 津寬寺 建設 水陸無遮大道場 금차 신축년 진관사 건설 법연 천지면양수륙무차대도량 十方法界 水陸空界 四生七趣 六道含靈 시방법계 수륙공계 사생칠취 육도함령 無主孤魂 哀魂 一切列位 列名靈駕 무주고혼 애혼 일체열위 열명영가 降臨道場 來會道場 至心諦聽 至心諦受 강림도량 내회도량 지심제청 지심제수 法性湛然周法界 甚深無量絶言詮 법성담연주법계 심심무량절언전 自從一念失元明 八萬塵勞俱作蔽로다 자종일념실원명 팔만진로구작폐 (水陸齋儀軌,1573 板本) (수륙재의궤, 1573 판본) 나무아미타불 시방법계(十方法界), 수륙공계(水陸空界), 수중고혼, 육지고혼, 허공계고혼, 사생칠취(四生七趣)고혼, 육도함령(六道含靈)고혼, 이런 무주고혼(無主孤魂), 애혼(哀魂) -의지할 데가 없다, 이 말이죠.- 슬픈 영혼들 일체 열위, 여러 지위에 있는 모든 열위, 여러 이름을 가진 열명영가(一切列位 列名靈駕). 강림도량(降臨道場)하시고, 이 도량에 오시고, 강림, 내회도량(來會道場)하셔서, 이 도량에 오시어 모이셔서, 지심제청(至心諦聽)하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으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받으십시오. 그게 청혼송이고요. 첫 번째 법문은 법성이 담연주법계(法性湛然周法界)하니, 만법이 있고, 만법의 본성이 있는데, 만법은 생사윤회가 있고 희로애락이 있는데, 본성은 극락세계예요. 그래서 천도라는 것은 만법 생사에서 법성 극락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만법은 생사요 법성은 극락이다. 극락은 왜 극락이냐. 죽음이 없고, 어두움이 없고, 공포가 없고, 다만 즐거움만 있기 때문에 극락이라고 한다, 이거거든요. 만법 생사에서 법성 극락세계로 가시도록 인도하는 것이 천도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법성이 담담해서, 어두움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서, 주법계라, 일체 만법세계에 두루하다, 법성이 없는 만법이 없다 이 말이죠. 심신무량절언전(甚深無量絶言詮)이라. 그 법성세계가 심히 깊고 헤아릴 수가 없어서 말이 끊어졌다. 말씀 언, 말씀 전. 말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생사가 왜 벌어졌나. 자종일념실원명(自從一念失元明)으로, 자종이라는 건 부터, 부터 자, 부터 종, 스스로 자, 쫓을 종이 전부 시작한다, 부터 한다 이 말인데, 한 생각이 원래 밝은 걸 잃어버렸다. 한 생각이 원래 밝은 것을 잃어버림으로부터. 그러면 한 생각이 원래 밝은 걸 왜 잃어버렸나. 요 법에 집착하면서 법성을 잃어버리게 된 거예요. ‘요게 법이다’ 그러면 이걸 그냥 보고 말면 되는데 여기에 딱 매달리면 그 시방 법계에 두루한 법성을 상실하게 돼요. 법계에 집착해서 법성을 상실했다. 그게 원명을 잃었다. 근원 원자, 밝을 명자. 근데 문제는 아무리 현상 법계에 집착을 한다 하더라도 그 법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근데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모를 뿐이다. 그게 참 분통 터질 일이에요. 가지고 있는데 모른다. 그래서 원래 밝은 걸 잃어버림으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나. 팔만진로구작폐(八萬塵勞俱作蔽)라, 팔만이라는 건 무량이라는 말인데, 팔만, 우리나라에서 팔만 많이 쓰는데, 그건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있기때문에 그래요. 왜 팔만이냐. 경판 판수가 팔만 천 이백 오십 팔매에요. 그래서 팔만대장경이라고, 학술 용어로는 고려대장경이요. 그래서 팔만인데, 팔만이라는 것은 그럼 팔만 천 이백 오십 팔매의 무량한 글자가 있고 그 글자 하나하나에 무량한 뜻이 있어서, 그냥 무량수, 한량없는 숫자를 그냥 팔만이라 그래요. 그래서 팔만 진로가, 진로라는 것은 티끌에 피로한 번뇌 망상인데요. 이게 보이는 데 집착하다 보면, 티끌 하나하나에 사람을 보면 사람에 집착하고, 물질을 보면 물질에 집착하고, 삶을 보면 삶을 집착해서, 이 티끌에 계속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 티끌로 말미암아 피로가 생겨요. 그래서 티끌 진자, 피로할 로자로 써서 진로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물질 집착 번뇌 망상을 진로라 그래요. 인간이 왜 고단하냐. 집착 때문에 그래요. 사람에 집착하고, 물질에 집착하고, 자기 삶과 죽음에 집착하고, 그게 진로요. 팔만 진로가, 한량없는 진로가 구작폐라, 함께 폐단을 지었다. 장애를 짓고 어려움을 지었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좋은 곳으로 가셔야 된다 이거죠. 靈然一箇主人公은 千古虛玄坐道場이니라 영연일개주인공 천고허현좌도량 正體堂堂明日月하고 往來常在涅槃床이로다 정체당당명일월 왕래상재열반상 (諸般文, 15744 板本) (제반문, 15744 판본)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팔만 진로가 항상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업장고뇌가 끊어지지 않아도 영연일개주인공(靈然一箇主人公)은 신령 령자, 그러할 연자, 그러할 연자는 다 어조사고. 신령하다. 왜 신령하냐. 죽어도 죽음이 없고, 살아도 삶이 없고, 가도 감이 없고, 와도 몸이 없어서 신령하다고 하는 거예요. 신령 령자가. 세월이 많이 지나도 세월이 없어요, 그 속에. 참, 정말로 희한한 세계에요. 마치 눈에다가 비유를 하면, 눈이 사람을 봐도 눈 안에는 사람이 없어. 눈이 호랑이를 봐도 눈에는 호랑이가 없어. 눈이 죽음을 봐도 눈에는 죽음이 없어요. 눈이 허공을 봐도 눈엔 허공이 없어요. 그게 항상 사람도 보고, 호랑이도 보고, 허공도 보고 못 보는 게 없어요. 그런데 항상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억만년이 지나갔는데 거기에는 억만년이 없어. 맨날 죽고 사는데 거기엔 죽고 사는 게 없어. 그러니까 신령하다는 거예요. 그걸 하나 딱 찾아놓으면 만사에 무가애 무가애(無罣礙)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그렇게 되는 거죠. 이건 안 새겨도 되겠죠, 무가애 무가애, 무유공포, 공포없어요. 전도몽상 번뇌 망상이 없어. 그래서 일개 주인공이라. 항상 그 자리에서 온갖 일을 다 하되 온갖 일에 물들지 않는다라고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거지, 주인이 있고 손님이 있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온갖 일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주인공이에요. 영연한, 신령스러운, 하나, 한 개 주인공이 천고허현(千古虛玄)하야, 천고라는 건 일천 천자, 옛 고자인데, 천은 많다는 숫자고 고는 세월이라는 뜻이에요, 옛 고자는. 한량없이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천고에, 허현해요, 텅 비었으면서 현묘해. 검을 현자는 묘할 묘자의 뜻인데, 텅 비었어요. 그게 우리가 깨달아야 할 내용이에요, 현묘. 허현. 텅 비면서 오묘해, 그래서 한량없는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비고 현묘해서 좌도량(坐道場)이라. 여기서 도량이라는 건 장소라는 말인데,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어요. 도량에 앉아 있어. 어디는 있고 어디는 없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거에요. 근데 그 자리가 얼마나 대단하냐. 정체가 당당(正體堂堂)하야, 그 허현한 상태로 도량에 앉아 있는 그 일개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한가. 정체가, 그 바른 몸이 당당해서 높고 높고 깊고 깊어서 명이 일월(明日月)이라. 밝음이 일월과 같다. 해와 달, 요새는 해와 달보다 더 밝게 시설을 잘 할 수도 있어요. 근데 그건 또 금방 없어지니까 그냥 일월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햇빛보다 더 밝게 할 수도 있다,이렇게 따지면 곤란해요. 이걸 직접 보는 게 중요하지. 근데 왕래상재열반상이라(往來常在涅槃床). 왕래, 갈 때나 올 때나 항상, 열반상, 이거 자리 상잔데, 중도, 실제중도상(實際中道床)하듯이, 그 자리에, 열반의 자리에 항상 있다. 열반은 죽음이 없는 자리다 이 말이죠. 죽음이 없는 자리에 항상 있다. 그러니까 이 영연일개주인공이라, 이걸 알았을 때 깨달음이라 그러고, 이걸 봤을 때 법성을 봤다, 심성을 봤다고 그래서 견성이라고 그러는데, 동아시아 조사선 불교에서는 요 본 걸로 그냥 살면 된다 그래서,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그래요. 그거 딱 보고 딴 생각 안 일으키면 그게 모든 걸 다 닦은 거다 이거지요. 일견갱불견, 한 번 보고 다시 보지 않는다. 일문갱불문, 한 번 듣고 다시 듣지 않는다. 딱 보고 딴 생각 안 일으키면 불기일념(不起一念)하면 다 닦은 거예요. 그래서 돈오돈수에요. 그 법으로 얘기를 하는 거죠. 그게 조사선이에요. 조사선은 딱 보는 순간에 다 닦는 거기 때문에 그게 돈오돈수거든. 그게 얼마나 신비한 법이에요. 그런데 그 이전에 수행법은 그 불성을 딱 보았는데 이즉돈오(理卽頓悟)라, 그 불성은 이치인데 이치는 봤는데, 이 몸이 아직까지 옛날 습관을 가지고 있다, 사비돈제(事非頓除)라. 오온 습관은 일시에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온 습관은 점차로 제거해야 된다. 그래서 이게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얘기한 거예요. 이거는 중하근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중근기, 하근기는 돈오점수가 맞고, 상근대지(上根大智)는 돈오돈수, 딱 보면 딴 생각 안 일으키면 그만이야. 일견 법성하고, 한 번 법성을 보고, 불기일념하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하면 그게 돈오돈수, 대지해탈이다. 끝나는 거죠. 그런데 중하근기는 보기는 봤는데 이게 오온 습관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오온 습관은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비돈제라. 사는 오온이고 이는 법성인데, 법성은 바로 볼 수가 있는데 오온습관은 바로 제거가 안 되니 차례 차례로 오온습관이 다 없어질 때까지 닦아야 한다. 이게 중하근기는 그렇게 해야 돼요. 중근기, 하근기는 돈오점수를 해야 돼요. 그런데 기본 불교에서는 돈오돈수도 처음에 가르친 게 아니고, 돈오점수도 처음에 가르친 게 아니고, 모든 일체 중생을 위해서 전식 성질을 가르쳤어요, 전식. 이 식을 바꿔서 지혜를 이루라. 전팔식성사지(轉八識成四智). 전팔식, 여덟 가지 식을 바꿔서 성사지,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거예요. 그럼 팔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오식, 제육식, 제칠식, 제팔식 그거잖아요. 이걸 바꾸면 이제 전오식을 바꾸고 제육식, 제칠식, 제팔식을 바꿔서 이루는 지혜가 사지에요. 이거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경전에서 다 가르치는 게 전식성지예요. 근데 조사들이 가르친 거는 돈오돈수 돈오점수를 가르쳤어요. 그래서 이게 불교하고 조교하고 교설 체계가 달라요. 근데 근기에 따라서 다 중요한 거예요. 일견법성하고 불기일념하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하면 그게 돈오돈수에요. 그래서 오늘 영가들께서도 이 자리에서 돈오돈수로 천도도 되고, 돈오점수로 천도도 되고, 전식성지로 천도도 되고. 여래 가피로 천도된다. 여래 가피가 뭐냐. 대비주 착어처럼 우황대비신주력(又況大悲神呪力), 대비신주력으로 중생성불이 찰나중(衆生成佛刹那中)이라, 중생성불이 찰나에 된다. 이게 신주 성불이에요. 신주. 신묘 대비 주문으로 중생성불이 찰나에 이루어진다. 이게 중생성불찰나중이거든요. 이런 법으로 시방법계 무주고혼이 다 극락세계에 가시는 거지요. 非識所能識 亦非心境界 비식소능식 역비심경계 其性本清淨 開示諸衆生 기성본청정 개시제중생 若於一切智 發生迴向心이면 약어일체지 발생회향심 見心無所生하야 當獲大名稱이로다 견심무소생 당획대명칭 (水陸齋儀撮要,15732 板本) (수륙재의촬요,15732 판본) 나무아미타불 살아있는 유정이나 돌아가신 영가나, 이런 법성일체지, 법성일체의 지혜 경계에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회향심(迴向心)이라는 게 돌아간다, 발생, 낸다,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내면, 견심무소생(見心無所生)하야, 번뇌망상이 한없이 있었는데 그 마음속에는 번뇌망상이 나온 일이 전혀 없어요. 이게 심은 무소생이라, 마음은 생긴 바가 없다. 기신론을 공부하다 보면 각심초기(覺心初起) 심무초상(心無初相)이라는 기신론 본문이 있는데, 어떤 강사 스님들은 각심이, 깨달은 마음이 처음 일어나면, 심무초상이라, 마음에는 처음 난 것이 없다. 이렇게 옛날 강사스님들은 가르쳤는데 그건 잘못 새긴 거예요. 그 밑에 필삭기 기문을 보면 심초기, 심초기는 소각심이라고 거기다 기록을 해놨어요. 깨달을 바 마음이다. 각은 능각이고. 그러면 각심이, 깨달은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건 아니고, 잘못돼요. 심초기를 깨달으면, 이렇게 돼 있어요. 마음이 처음 일어난 것을 깨달으면, 알면, 그 옛날 어른들이 잘 봐놨는데 그걸 잘못 보면 잘못 새겨요. 심초기가 있어, 마음이 처음에 일어날 때가, 그게 무슨 마음이냐. 근데 이거는 등각에 가야 알아요, 이거는 심초기를. 처음에는 불성을 알고 번뇌가 처음 일어난 거 알려면, 불성은 초지에서 아는데, 이게 전식성지 과정론이에요. 번뇌 처음 일어나는 거는 십지 지나서 등각 금강지에 가서 아는 거에요. 그래서 능엄경에서도 제3권에서 법신을 봤는데 오온에서 완전 해탈한 거는 10권 제일 마지막에 가서 이즉돈오나 사비 돈제라. 이거는 능엄경 10권 유통본 직전에 있어요. 이래서 이게 처음에는 불성을 아는데 마지막에는 최초의 번뇌 망상 망념이 언제 일어났는지 고걸 안다 이거에요. 그게 심초기에요, 심초기. 그거는 초지에서 모르고, 십지 지나서 등각, 등각을 금강지라고 그러는데, 금강지에 가서 알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중생이 한 생각을 일으켰다고 그러는데, 한 생각 일으킨 거를 나중에 밝은 마음으로 가만히 보니까 일어난 바가 없더라. 마음은 생긴 바가 없는 걸 본다. 그러면은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요, 이걸 대명칭이라고 해요. 안으로 십불이고 밖으로 보현이니 대인의 경계다, 이말이에요. 이걸 큰 명칭을 받게 되는 대명칭이라. 대해탈, 대정각, 대명칭이죠. 근데 이게, 마음이 일어났는데 일어난 것이 없는 걸 아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이거는 꿈에서 완전히 깨야 ‘아이 꿈이 그게 본래 없었구나.’ 이걸 아는 거에요. 앞에 여기 스님들만 계시니까 옛날 강당에서 경 새기듯이 이렇게 해요. 저 밖에는 안 보여서 그래요. 그냥 그러니까 재미없어도 듣기만 하셔도 대공덕을 얻으시는 거예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더워도 잘 들으세요.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나무아미타불 이 공덕이 다 성불하도록 기원하는 겁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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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8월 23일 국행수륙재 입재 법문
주지 계호스님 2021-08-23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진관사국행수륙재가 오늘 입재를 시작으로 7.7재 형식으로 49일간 봉행됩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의 건국초기인 1397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59칸의 수륙사가 건립되면서 실행된 공식적인 왕실 천도재로서 국가 무형문화재 제126호입니다. 수륙재는 위로는 시방세계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대중들, 아래로는 영가를 비롯해 과거 현재 미래의 인연 있는 모든 이들, 괴롭고 외롭고 아픈 영혼들, 생명있는 존재와 생명없는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 법의 연회에 초청받아 법의 음식을 공양받게 되니 가장 기쁘고 환희로운 날입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차별 없이 불법을 전하는 우리나라의 큰 불교의식이며,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의례입니다. 이 수륙도량에 들어오기만 해도 모든 중생들은 삼업이 녹고, 모든 망자들, 유주무주 고혼들은 이고득락한다고 했습니다. 시방법계 유주무주 영가를 천도할 뿐만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모든 생명을 존중하게 하는, 뭇 존재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의례가 바로 수륙재입니다. 그리고 수륙재는 소통과 화합이며 불교의례를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나아가 국민을 화합하고 국가의 번창을 기원하는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종을 집대성하신 나옹큰스님께서는 수륙재를 “어두운 세상, 밝은 세상의 큰 도량이며 티끌마다 세계마다 두루 미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륙재의 큰 뜻은 모든 사람이 산사람은 큰 행복과 돌아가신 분은 영가 천도되는, 왕생극락할 수 있는 큰 의식입니다. 오늘 칠칠일간 법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는 진관사국행수륙재 입재를 시작하여 영가를 불러 맞이하고 관욕소에서 첫 목욕재계를 하였습니다. 남자 영가는 코끼리 상, 우레소리 뇌, ‘상뇌(象雷)’라는 거울을 보고 코끼리처럼 용맹정진의 마음을 내었고, 여자 영가는 무소 서, 달 월, ‘서월(犀月)’이라는 거울을 보고 무소의 뿔처럼 고요히 나아갈 마음을 냈습니다. 낡고 더러워진 마음의 옷을 벗고 새로운 밝은 법에 이제 비로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수륙재가 봉행되는 동안 매주 수륙연기로 수륙재의 인연을 처음으로 밝히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법화경 일곱권을 사부대중들이 7.7재마다 독송하고 법공양으로 올려 석가모니부처님의 저 끝없는 공덕을 찬탄합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19로 큰 어려움을 겪고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불안속에 있는 상황인데 사부대중의 동참원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기도를 봉행하며 수륙재의 설행을 통해서 코로나19가 종식하고 모두 함께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또한 지극정성으로 설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해야하는 진관사 수륙재는 온라인 방송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도량에서 함께 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지만 불자님들 모두 온라인 방송을 보시며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관사는 모두의 <마음의 정원>이며,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를 발원하여 늘 정진하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 모두가 부처님이란 것을 명심하면서 다 같이 부처님 되시길 기원하며, 하고자 발원하는 모든 일들 뜻과 같이 이루어지길 심축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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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8월 22일(음력 7월 15일) 백중기도 회향 및 승보공양
주지 계호스님 2021-08-22
안녕하세요. 오늘은 저희들이 선방에서 3개월 동안 정진하면서 회향하는 해제 날입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지옥문이 열리는 백중날이기도 합니다. 49일 동안 선망 부모님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극락왕생과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정성껏 올렸습니다. 불자님들께서 정성껏 올린 기도의 공덕으로 원하는 바 모든 일이 성취되시길 진심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백중기도 회향과 하안거을 마친 청정한 스님들께서 영가들을 해탈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을 염원하고, 수행해 진심을 쏟은 스님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앞으로 더더욱 중생 구조에 힘써 달라는 서원을 담아서, 진관사 신도회 심대근 회장님을 비롯해서 수석부회장님, 임원들, 많은 신도님께서 승보공양을 올려주셨습니다. 대중스님들 모두를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이렇게 정성껏 올려주신 승보공양을 받은 저희들을 비롯해서 대중스님들께서 수행자로서 더더욱 정진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타행을 할 수 있는 수행자가 되며, 또 진리의 길로의 안내자가 돼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계속 확대되어서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불자님들과 함께 더불어 같이 못하는 점을 이해하시고 진관사 TV 방송을 통해서 함께 보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코로나 방역을 잘 준수해 주시기를 당부드리고, 저희들도 코로나 백신을 완료했다는 뱃지를 달았습니다. 두 번 맞았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도 거리두기를 하면서 신심껏하는 것이 바로 백신입니다. 물론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고 거리두기를 하면서 방비도 하지만, 신심을 다해서 열심히 하면 이것이 바로 코로나를 이기는 코로나 백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환희로운 승보공양법회에 함께하신 인연으로 뜻하신바 모든 일들이 성취되시고, 모두 함께 정진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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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8월22일(음력 7월15일) 백중기도회향 법문
총무 법해스님 2021-08-22
안녕하세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오늘은 신축년 백중(百中), 우란분절(盂蘭盆節)입니다. 올해만큼 더운 날씨도 드물었죠. ‘덥다 덥다’ 했는데 어느새 바람 끝이 시원한 계절이 곧 올 것 같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 무상함을 보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본인에게 행복하지 못한 시간은 남은 시간 동안 사용해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시간만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백중을 맞이해서, 부처님 당시에 왜 백중이 생겼는지, 백중의 유래와 백중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중은 원래 백종(百種)이라고도 하고요. 조상님과 제불제천(諸佛諸天)에게, 모든 감사의 의미로 채소와 과일, 곡식 등 100가지 음식을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낸다 해서 백종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합니다. 돌아가신 선친들의 감사함, 또 곡식을 다 익어서 올린다 해서 망혼일의 제사가 있습니다. 또 중원일(中元日)이라고도 하는데, 1년 365일 중에 오늘 7월 15일은 가장 가운데가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정월보름은 상원일(上元日)이라 하고, 10월 15일을 하원일(下元日)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천신들이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나?’, 인간의 선악을 살피러 내려오시는 날이라서, 그날 많은 과일과 제물을 올려놓고 정성스럽게 잘 봐달라고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는 이 백중이 왜 생겼으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불가에서는 백중일을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 합니다. 또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도 하고, 해제일이라고도 합니다. 90일 동안 스님들이 하안거 정진을 하고 오늘 해제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97개의 선원이 있더라고요. 97개 선원에서 1,800 거의 1,900여 명의 스님들이 하안거 기도를 오늘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또 자자일(自恣日)이라고도 합니다. 스님들이 90일 동안에 기도 정진을 하면서 내가 마음을 잘못 썼거나 대중을 속였거나 화를 내었거나 탐욕을 부렸거나 했던 잘못을, 모여서, ‘저는 이번 구순안거(九旬安居) 동안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참회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중은 우란분절이라고 하는데요. 부처님 당시에 목련존자, 목건련존자, 목건련이라고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한 분이 계십니다. 신통이 자재하셔서 사리불존자는 지혜제일존자, 목건련존자는 신통제일존자라고 합니다. 목건련 존자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 비하르주의 왕사성이라는 곳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브라만인 아주 귀족 집안에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때 웃동네, 나란다 마을에는 사리불존자가 같이 태어납니다, 같은 날. 웃동네 아랫동네에서 지혜제일인 사리불 존자도 그날 태어나고, 이 목련존자도 그날 태어납니다. 이 사리불과 목건련은 너무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다가 목련존자 아버님이 나이가 드셔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재산분배를 합니다. 3분의 1은 어머니의 생활비로 드리고, 3분의 1은 본인이 사업 자금으로 가져가고, 3분의 1은 아버지의 천도와 공덕을 짓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맡겨둡니다. ‘어머니, 500명의 수행 스님들을 불러서 공양도 하고, 대중공양도 하고, 기도비도 내시고 하시라.’ 그리고는 본인은 사업차 길을 떠나게 됩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마. 잘 다녀오느라.’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을 보내놓고 그날부터 자유부인이 됩니다. 완전히 소 잡고 돼지 잡고 매일같이 그냥 흥청거리면서 연회를 베풀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습니다. 그러니까 욕심내고 화내고 이런 생활을 매일같이 하는 거예요. 맨날 맨날 그렇게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완전 지탄을 합니다. ‘아니 대중공양하고 공덕을 지으라고 아들이 그렇게 부탁을 해놓고 갔는데 매일 저러고 있구나.’ 아들은 사업이 너무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어 3년 만에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보니까 마을 사람들의 민원이 보통이 아닌 거예요. 여기저기에서 ‘어머니가 그런 행동을 했어, 이 마을이 그냥 거의 퇴락한 마을이 다 되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아니 난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 마을에서 네가 없고, 너희 아버지가 없으니까 나를 업신여겨 저렇게 모함을 하고 있다. 만약에 내가 그런 짓을 했다면 내가 7일 만에 죽을 것이다, 죽어선 아비지옥에 갈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 말을 믿어야 되겠죠. ‘그래 어머니가 참 너무 힘들게 되셨구나.’ 아들은 그 효심에 어머니 말을 100% 믿었어요. 그런데 7일이 됐는데 어머니가 진짜 돌아가시는 거예요. 누구 말이 맞았어요? 마을 사람들의 말이 맞았고, 어머니 본인이 스스로 그런 말을 해서, 인과에 의해서 그 말이 그대로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목련존자는 너무 상심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는 육사외도들이 많았습니다. 기원전 5-6세기에는 춘추전국시대 마냥 철학과 종교가 막 그냥 우후죽순 있었습니다. 그중에 대표되는 종교가 산자야 학파라고 있었는데, 그 학파에서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는 걸 보고 목련존자는 사리불존자와 같이 같이 출가를 합니다. 이렇게 출가해서 거기에서 열심히 정진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 10대 제자 중 지혜 제일, 우리 반야심경에 매일 나오는 부처님 제자죠, 지혜제일 사리불존자가 부처님 제자 중에서 -오비구라고 부처님이 최초 설법한 그 제자, 마승이라는 비구, 인도 말로 앗사지라고 하는데,- 마승 비구의 걸어가는 자태를 보고 너무 여법하여 ‘저 사람은 스승이 누구일까?’ 이렇게 의심이 들어서 여쭤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의 제자입니다.’ 거기에서 인연법을 듣습니다. 인연 연기법을 듣고 사리불이 발심을 합니다. 사리불은 목건련존자에게 얘기를 합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어서 이렇게 훌륭한 스승이 되었으니 우리 그쪽으로 가서 모두 그 공부를 한번 해보자.’ ‘아 좋은 생각이야.’ 그래서 모두, 그 산자야학파 그 교단에 있던 200명이 넘는 그 수행승들을 몽땅 데리고 출가를 해서, 부처님 제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자야가 너무 기가 막혔어요.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가 큰 수제자였는데, 자기만 가는 게 아니고, 그 200여 명의 제자를 다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열통이 터져 죽어요. 두 존자와 제자들은 부처님께 사대 지수화풍의 명상법을 듣고, 계속 정진을 하다가, 목련 존자는 7일 만에 깨쳤어요.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4대가 홀산(四大-忽散)이다, 사대가 다 모였다가 흩어진다’라는 명상법을 하고, 계속 열심히 정진을 하다가 7일 만에 깨치고, 사리불존자는 지혜제일인데도 목련존자보다 7일 늦게 15일 만에 도를 깨칩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을 얻은 목련존자와 사리불존자는 늘 부처님 옆에서 정진을 합니다. 부처님 옆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을 같이 지도하고 부처님이 자리에 안 계실 때는 일을 일임하고,-제가 주지 스님 안 계실 때 제가 주지스님 일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 일을 해도 너끈히, 너무나 제자들을 잘 대접하고 또 신도들을 잘 대접하고, 그리고 데바닷다 같이 말썽꾸러기 제자들의 문제도 잘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안거기간이었습니다. -90일 동안 인도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우기에 스님들이 다니면 너무 초라하고 또 걸어 다니면 벌레도 죽고 하니까 90일 동안 하안거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안거 중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너무 환희로운 거예요. 환희로와서 부처님께 그저 감사하는 거예요. -제 마음 같은가 봐요. 제가 요즘 맨날 부처님께 너무 감사한 거예요. -목련존자도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머니,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를 길러주시고, 어머니는 자기 본인을 잉태해 가지고 얼마나 애를 쓰셨나.’ 그래서 천상에 가봤어요. 입정해서 천상을 둘러보니까 아버지는 너무 천상에서 잘 계시는데 어머니가 안 보이는 거예요. ‘아 이상하다. 왜 어머니가 보이지 않지.’ 그래서 부처님께 방선을 하고 여쭤봅니다. ‘부처님 천상에 가니 저희 어머니가 없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여쭤보니까 부처님이 입정을 해보시고 ‘너희 어머니 청제부인은 -목련존자 어머니 이름이 청제부인이었습니다.- 지금 무간지옥에 떨어져 있느니라.’ ‘무간지옥에 떨어지다니요.’ 그래서 무간지옥에 가보니까 어머니가 너무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찾는 거예요. ‘부처님. 어떻게 하면 저희 어머니를 구제할 수 있습니까?’ 그 지옥에 가기 전에, 부처님이 목련존자에게 가사와 발우를 주죠. -여러분들도 그렇죠. 스님들에게 가사, 발우 공양을 하면 무량한 공덕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발우는 깨달음을 이루는 그릇이고 밥을 먹게, 그 스님에게 약을 주는 그릇, 밥을 받는 그릇이고, 가사는 법복, 해탈복, 깨달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주위에서 ‘나는 가사 공양을 꼭 해야 되겠다, 발우 공양을 하겠다.’ 이런 기회가 있으면 꼭 동참하세요.- 지옥문도 여는 가사와 발우를 목련존자가 들고 갑니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부처님 가사와 발우를 들고 지옥을 가니까 지옥문이 스르르 열리는 거예요. 그 지옥 간수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지옥문이 이제껏 한 번도 안 열렸는데, 어떻게 해서 지옥문이 이렇게 열리느냐.’ ‘부처님의 발우로 이 지옥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찾는 거예요. 어머니를 찾아보니 배는 앞산만 하고 목구멍은 바늘같은, 허기에 지친 아귀가 되어 가지고 어머니가 엉금엉금 걸어오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아들인지도 모르고 ‘저를 좀 살려주세요. 저를 좀 살려주세요’ 이러는 거예요. 그때 목련존자가 어머니 손을 잡고, ‘어머니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왜 여기에 계십니까’ 그러니까 ‘제가 살아생전에 거짓말하고, 욕심내고, 화내고, 인과를 믿지 않아 죽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 144개 중에서 가장 험악한 지옥이 아귀 지옥이에요. 못 먹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어머니에게 밥을 드렸어요. ’어머니 이 밥을 좀 드십시오.’ 하니까 어머니가 고마워서 그 밥을 받아 먹는 순간 밥이 숯이 돼버리는 거예요. 너무 기가 막히는 거예요. 밥이 그냥 타버리고 숯이 되는 거예요. 우리 경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한방울의 물이 보는 대로, 그 업식대로 느껴진다고. 우리가, 사람이 보면 그게 물로 보여요. 물이 생명수, 물은 생명이죠. 생명수로 물이 보이는데, 물고기가 보면 집으로 보여요. 물고기에겐 우리 집으로 보이고, 천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울로 보여요. 그래서 물에 이렇게 하늘이 비치면 다 비쳐지죠. 천상 사람들이 볼 때는 거울이라 여기는데 아귀들에게는 불로 보인다는 거예요. 자기 업력대로 모든 것이 보이는데, 이 목련존자 어머니 청제 부인도 아귀가 되어서 밥을 주니까 숯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부처님께 여쭙니다. ‘부처님 저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합니다. 이 어머니를 어떻게 구제하면 좋을까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구제할 방법이 딱 한 가지가 있느니라’ ‘그게 뭡니까’ ‘대승경전을 어머니를 위해서 읽어드리고, 49개의 등불을 켜고, 불을 켜서 등을 밝히고, 그리고 많은 스님들을 불러서 해제 날, 백중 날 공양을 해라. 그렇게 하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련존자가 해제일까지 경전을, 대승경전을, 계속 독송합니다. 경전을 독송하고 등불을 켜고, 열심히 정진을 하죠. 정진을 하고 해제일에 맞춰서 공양물을 준비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스님들께 승보 공양을 한 것처럼 공양을 준비해서 해제일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해제날 스님들을 정성껏 불러서, 본인이 스님들을 지도하는 소임을 맡고 계시지만, 하나하나, 사미승까지 불러서 대중공양물, 과일을 공양하고 옷을 공양합니다. 그렇게 공양을 하니까 어머니가 구출이 되는 거예요. 어머니만 구출이 되는 게 아니라, 지옥의 문이 다 열려서, 그날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저 중생들이 특별사면되는 날이었어요. 그래서 그 유래에서 나온 의식이 이 백중입니다. 그러면 매번 이 백중을 맞이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작 자수(自作自受), 내가 지었고 내가 받는다>입니다. 모든 것은 내가 지어서 내가 받게 돼 있어요. 그 목련존자 어머니도 자기가 그런 나쁜 짓을 하면서, 그 아들이 왔을 때 ‘그래 내가 잘못을 했구나’라고 참회를 했으면 아마 바로 그렇게 돌아가셔서 지옥보를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지옥보를 받는 것도, 결국 나의 인과에 의해서 지옥을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불교의 효사상은 몸으로 하는 효도 있지만, 마음을 바꿔주는, 모든 번뇌를 떨어뜨리고 공덕을 짓고 마음을 닦고 그래서 진리의 길을 인도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권해주는, 천거해 주는 그런 공덕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나는 부처다, 내가 부처다>라는 것을 꼭 믿어야 돼요. 그 가르침을 태산같이 믿어서 움직이지 않아야 돼요. ‘나는 부처고 내 옆에 있는 분도 부처다.’ 남을 나처럼 생각하며, 남을 나처럼 생각하면 그 공덕이 무량해요. 그거를 믿고 실천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진관사 신도님들은 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를 실천하고 또 본인이 먼저 ‘내가 부처님이구나’를 믿는다면, 그대로 내가 부처님처럼 행동하는 거예요. 부처님처럼 행동하다 보면 부처님을 닮게 됩니다. 부처님을 닮다 보면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주위의 가족들이 다 편안해집니다. 또 가족도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으로 모시면 돼요. 자기 남편을, 자기 아들을, 자기 며느리를, 자기 손자를 부처님으로 안 보는 것이 가장 큰 병이에요. 우리가, 내가 가진 병은, 중생의 병은 집착이거든요. 가족을 부처님으로 보지 않고 나의 부속물로 보고, ‘너는 이렇게 해라.’ 라고만 하고, 이러다 보니까 검은 길로만 빠지는 거예요. 서울을 가야 되는데 자꾸 부산을 가고 있는 거예요. 진관사 신도님들은 복이 많아 그렇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신도님들은 그렇지 않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해주세요.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부처예요. 당신 가족이 다 부처입니다.’ 이렇게 얘기 한마디만 해도 공덕이 무량해요. 올해는 우리 교무 선행 스님께서 기도를 엄청 열심히 해 주셨어요. 선행 스님 아버님이 올해 돌아가셨는데, 아마 효행을 한 듯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 동참대중의 모든 영가들도 덕을 봤어요. 본인이 아버님을 천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정성껏 기도를 했겠어요. 박수 한번 크게 쳐주세요. 선행스님 또 진관사 대중 스님들도 같이 마음을 모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화합은 하나를 만드는 거거든요. 기도는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화합은 하나를 만들고, 기도도 하나를 만들고, 하나가 되면 못 할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하나가 잘 안 되고 모래알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대한민국을, 많은 나라들 중에서 대한민국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런 업연을, 동업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나 혼자서, 독불장군은 없어요. 그만큼 어리석은 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주 나쁜 버릇이 있는데, 당파, 우리끼리 우리끼리 우리끼리. 그래서 저희 옛날에 치문반 때 스님들이 ‘우리라는 말을 쓰지 말아라, 우리 우리 돼지우리냐’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 당파에 망하는 거예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에요. 내가 곧 다른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다. 이런 생각을 늘 마음에 가지고, 지혜롭고 자비롭게 이렇게 1시간 1시간, 시시때때를 그렇게 살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거고, 날마다 행복할 것이고, 안 되는 일이 없는 그런 불자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법문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모두 기도 성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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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8월 15일 백중기도 6재 법문
가섭스님 2021-08-15
안녕하세요. 오늘은 백중 6재입니다. 지금 오다가 선우스님과 청법선생님들에게 진관사 태극기를 받았습니다. 진관사에는 칠성각에서 나온 진관사 태극기가 있지요. 진관사 태극기는 새로 그린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 위에 덧댄 태극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긴 세월 동안 억압에서, 상처를 덧대고 또 그런 상처를 위로하고, 그 상처 위에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잘 그려내기 위한 간절함이 담겨 있는 게 진관사 태극기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태극기를 보면 짜릿함이 있죠. 뭔가 모를 뭉클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관사 태극기는 더욱더 그런 마음들을 간절하게 하고 지극하게 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관사 태극기를 마음속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잊지 않고, 그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광복절이지요. 광복이라고 하는 말은 <되찾은 빛> 이렇게 번역할 수가 있어요. 억압이나 내지는 시달림에서, 내지는 폭압에서 벗어난 정말 진정한 빛을 찾은 건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는 76돌을 맞는 광복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의 빛을 찾는 것이 진정한 광복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빛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되살려라.’ 그런데 그 빛은 밖에서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빛이기 때문에, 그것을 오롯하게 드러내면 된다라는 거죠. 그 마음에 있던 빛을 오롯하게 드러낸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고, 또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잖아요. 우리의 마음의 빛이라고 하는 건 어떻게 보면은 지혜라고 말할 수 있고, 광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지혜 광명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광복이고, 76돌을 맞는 우리 불자들이 이 광복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내 마음의 빛을 되찾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덕성을 제대로 되찾는 것이 진정한 광복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진정한 빛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 번째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내 마음의 전환을 통해서 그것을 찾아야 됩니다. 우리는 전환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람이 갖는 가장 큰 힘 중의 하나가 뭐냐면 전환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분위기나 환경만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도 전환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전환이라는 것을 연습을 하지 않다 보니, 분위기를 전환한다든가 환경을 전환한다든가해서 마음을 전환하려고 하는 시도도 해보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진정한 전환은 말 그대로 우리 마음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광복이라고 할 때 그 복자가 돌린다는 뜻이에요. 돌린다는 것 중에, 우리가 늘 하는 것은 귀의(歸依)라는 게 있어요, 귀의. 귀의할 때 귀. 돌이킨다. 돌이켜 의지한다. 이런 거거든요. 돌이켜 의지하는데, 누구한테 의지하느냐. 내 마음의 부처, 내 마음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진정한 광복이라고 하는 것 또한 전환하는 거죠.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을 되찾는 거라는 거죠. 우리는 지금 잃어버리고 있어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불성이라고 하는 것, 자성이라고 하는 것, 연기라고 하는 것, 법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사는데, 그것을 되찾는 거, 그게 광복입니다. 그건 전환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다음에는 이제 또 하나가 공동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다고 그랬어요. 오늘이 그 첫 시간이 될 것 같은데, 공동체와 이 백중이 어떻게 같으냐. 어떻게 융화가 되느냐라는 겁니다. 백중의 출발점을 보면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택하지요? 100명의 대중을 모셔요. 그리고 100가지의 음식을 마련해 놓고 법회를 열잖아요. 공동체의 어떠한 문제점들을 혼자 풀거나 부처님이 알아서 풀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거기서 시사하는 바는 ‘어떠한 문제점들을 대중과 함께 공동체적으로 풀어라.’ 하는 얘기입니다. 그게 백중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공동체가 공업(共業)으로 쌓아서 받는 거기 때문에, 업이라고 하는 거는 자업자득이잖아요. 내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건데 그러한 공동체적인 업도 마찬가지다. ‘그 공동체적인 업은 공동체가 함께 손을 잡고 또 마음을 나누면서 해결해야지만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 백중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렸던 개인의 어떤 전환을 통해서 자기의 번뇌를, 어리석음을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것은 개인의 업을 해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말씀드렸던 이 공업은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돼요, 공동체적으로. 그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려면 선제적으로 개인의 괴로움을 해결해야 돼요. 개인이 행복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쉽게 대답을 못합니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 광복을 한 지 이미 76년이 되는 우리 대한민국의 주인공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생각을 잘 못한단 말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헬(hell)라고 하는 용어가, 지옥이라는 용어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게 사라진 지가 한 3, 4년 됩니다. 짧게는 2년 전만 해도 헬이라고 하는, 헬 조선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조선시대가 헬이라는 말인가요? 조선시대가 지옥이란 말인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대한민국은 지옥이 아니거든요. 우리만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을 다른 나라에서는, 이웃 나라에서는 살기 좋은 나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헬이라고 해요. 왜 그럴까. 그거는 개인이 스스로가 괴롭다, 힘들다, 어렵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죽을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을 좀 내려 놔야 되는데, 그걸 못 내려놔서 그렇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공업적인 측면에서, 이건 개인적인 거고, 앞에 얘기한 건 개인 업인 거고, 공업적인 측면에서는 이제 우리 공동체가 그동안 소홀했던 부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자녀 교육을 할 때나 또 가장 작은 가족 공동체에서 우리가 좀 간과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그러면 첫 번째로는. 생명에 관련된 소중함을 우리가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거보다 앞서서는 나눔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 가치나 그런 철학이나 공동체의 그러한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30대, 40대 아이들이 자랄 때, 그 전 세대 60대, 70대에 어머니들은 너무 어렵고 너무 힘든 삶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경쟁을 가르쳤어요. 나눔보다는 ‘내 것을 먼저 챙겨라. 더 나가서는 한 대 맞으면 꼭 때리고 와. 한 대 때리고 와라. 맞고는 못 산다. 맞는 분위기, 그런 걸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 안 돼. 넌 맞으면 꼬집기라도 하고 와야 해. 그리고 나누는 거보다는 네 것부터 챙겨야 돼.’ 이렇게 우리는 3~40년을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눔, 두 번째는 생명, 그다음에는 환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환경 안에 살면서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간과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마치 당연하듯이 일회용품을 쓰고 또 당연하듯이 편한 대로, 좀 더 편하게 좀 더 잊고 쓰고 사용하고 살았단 말이죠. 그런 결과 지금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어요. 기후 위기라고 하는 게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 이야기가 돼버렸죠. 갑자기 멕시코 같은 더운 나라에서 눈이 오기도 하고, 비가 엄청 쏟아지기도 하고, 불이 나 가지고 지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습니다. 전 세계가 지금 산불로 인해 가지고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어요. 이게 다 환경을 우리가 소홀히 한 과보죠. 이건 공업이에요, 공업. 개인이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우리만 넉넉하게 살려고 했던 거예요. 이 환경이라고 하는 거, 이 지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쓰다 물려줘야 하는 건데, 적어도 이 100년 사이 근대에 들어서서, 근현대에 들어서서, 그 생각을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또 하나가 뭐냐 하면 평화라는 거예요, 평화. 좀 이따 말씀드리겠지만, 생각의 차이로 우리는 평화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삶의 큰 무게 중심으로 두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이 평화라고 하는 건 이제 경제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평화를 잘 이어 나가서 그 나라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로 연결이 돼요. 그래서 평화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지막으로 인권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권. 청구 인권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주어진 인권이라는 게 있는데 그 인권이 사회의 양극화로 인해 가지고 사회 계급화가 되고 있어요. 잘 사는 사람하고 못사는 사람이, 쉽게 말하면, 흑수저와 금수저가 애당초 나눠져 있다고 생각을 해요. 여기에서 인권이 무시되기 시작합니다. 더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여기서 마무리를 하자면, 적어도 지금 말씀드렸듯이, 다섯 가지의 가치를 우리는 이제 공동체 안에서 다시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불제자의 삶 속에 녹여내야 그것이 이 시대의 부처님 말씀을 새롭게 살려내는 길입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면 부처님 말씀은 2천 500년 전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 아주 오래된 종교로만 남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던 나눔, 생명, 평화, 환경, 인권, 이 다섯 가지 가치를 우리 불자들의 삶 속에서 살려내야 됩니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관심 가질 단계에요. 이러한 가치들이 아직 정립이 안 돼 있는데 그 다섯 가지의 가치를 삶에서 실천하라 그러면 남의 얘기가 되는 거예요. 지금은 어느 때냐. 지금 말씀드렸던 이 다섯 가지 가치를 생각하고 알아보고 공부할 때입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나눔이라고 하는 게 어떤 것이 있고, 생명이라고 하는 게 어떤 것이 있고, 환경이라고 하는 게 어떤 것이 있고, 평화라는 게 어떤 것이 있고, 인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있는지. 인권은 좀 멀게 느껴질 수 있지만 참으로 진정한 인권주의자는 부처님이었습니다. 당신이 출가할 때의 그 고민, 고민, 고민들을 보면, 사람의 인권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고민을 하시고, 그 인권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서 출가하신 겁니다. 이 다섯 가지 가치는 불교 경전에 8만 4천 가르침의 엑기스입니다. 이 다섯 가지 가치를 벗어나면 부처님 말씀이 없습니다. 공동체적으로, 이제 우리 수행 공동체에서, 불교 공동체에서 이 다섯 가지 가치를 제대로 살려내야, 21세기, 22세기, 앞으로, 지금의 온 시간만큼 앞으로도 우리 불교가 이 땅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거 누가 얘기했습니까. 부처님이 이미 말씀 해놓으셨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을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 불자들이 하나하나 고민하고, 하나하나 알아보고, 하나하나 공부해서, 내 삶 속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백중이라고 하는 건 공동체를 살려내는 것이고, 그 공동체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공동체적으로 풀어라’라고 하는 것이 백중의 또 다른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나, 개인이 행복해야 된다는 거잖아요. 개인이 행복해야 되요. 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가한 사람이 자기 몸에 빠져 가지고 늘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으면 수행의 진척이 없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가 행복하다. 아, 내가 참 출가를 잘했구나. 이 수행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이 너무나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때 내가 가장 행복했어요. 그리고 그때 수행의 깊이가 가장 깊어졌습니다. 다라니를 염송하고, 경전을 읽고, 화두를 들고, 이럴 때에 수행의 깊이도 깊어지지만, 더더욱 깊어질 때는 내스스로가 나를 정말 행복한 수행자라고 생각할 때, 그때 수행의 깊이가 가장 깊어지더라고요. 삶도 마찬가지죠. 삶도 자기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다는 생각보다는 괴롭다는 생각이 많죠. 왜 괴롭냐. 그 괴로움의 근본 뿌리는 어리석음이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어요. 두 가지다. 하나는 치암(癡闇)이다. 또 하나는 치혹(癡惑)이다. 의혹할 때 혹. 하나는 어둠이고 캄캄한 거고 또 하나는 이것 저것 잘 구분이 안 가는 거예요. 결국은 그 어리석음으로 올라오는 게 뭐냐면, 화가 있어요, 화. 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공동체 구성원이 행복하다라고 느끼려면, 스스로가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려면, 마음의 화를 없애야 돼요. 화를 조절해야 됩니다. 화를 드러내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차 있는 상태에요. 그러다 보니까 행복 지수 제로, 꼴지, 자살률이 2위가 됐다 1위가 됐다라고 보는 데, 그러나 노인 자살률은 1위에요. 그리고 묻지마 폭행, 이게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에 절절 끓는 이 화덩어리를 대변하는 거예요, 묻지마 폭행. 운전하다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고 내려 가지고 골프채를 막 휘둘러요. 여러분 뉴스 보신 적 있죠. 그게 화예요. 못 참는 거에요. 나를 조금이라도 방해하거나, 나를 조금이라도 침해한다고 생각하면 몸을 부르르 떨고 못 참아요. 형제,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간에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져, 잔소리하는 누나의 목숨을 앗았습니다. 목숨을 앗은 것뿐만 아니라 너무 잔인하게 처리를 했어요. 시신을 유기했죠. 화 내고나면 본인이 왜 그런지도 몰라요. 잔소리 하는 게 잘되라고 얘기하는 것을 못 견디는 거예요.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이 유튜브를 보는 시청자들이나 아니면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와서 업무를 함께하는 분들이나 내 얘기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 마음속에 화가 얼마나 있는지를 관찰하고 이 내 마음의 화를 덜어내려고 해야 해요. 화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재상은 비상이라고 그랬잖아요.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이것만 알아차리면 다 해결되는 건데. 그렇게 깊이 들어가기까지, 그렇게 마음의 힘을 갖기까지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화라는 것을 들여다 보면 어리석음이 그 근원인데, 화라는 게 잘 차려진 밥상과도 같아요. 여러분이 어느 집에 갔는데 밥상을 차려줬어요. 그 밥상이 내 밥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먹어야 되는 거죠. 안 먹으면 어떻게 돼요? 다른 사람이 먹잖아요. 이게 밥상 비유에요. 부처님께서 밥상 비유를 하신 거에요. 화라고 하는 것은 밥상과도 같은 거예요. 이 말씀을 왜 드리냐 하면, 화낼 때 우리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 중에 ‘너 때문에’ 라고 해요. 화를 낸 것은 나 때문에가 아니에요. 화는 뭐 때문에 납니까. 너 때문에, 당신 때문에, 자식 때문에, 이웃 때문에, 동료 때문에 이렇게 늘 화의 원인은 타자에게, 타인에게 돌리는 습관이 있죠. 그런데 그 화를 한 발자국만 돌아보면. 화를 내는 게 누구예요. 자기 자신이거든요. 밥상을 받은 건 나예요. 물론 밥상을 차린 건 다른 사람이 있지만, 그 밥상을 받아서 맛있게 먹은 건 나란 말이죠. 또는 부처님 경전에 보면, 모래의 비유가 있어요. 바람이 부는데 바람을 마주하고 모래를 던지면 어떻게 되느냐. 그 모래가 어디로 갑니까. 자기 얼굴로 가죠. 또 소금의 비유도 있어요. 부처님도 이렇게 화에 대해서 비유를 많이 드셨어요. 소금은 먹으면 짜지만, 소금을 한강에다가 뿌리면 소금의 짠맛이 느껴질까요, 안 느껴질까요? 화라는 게 내가 지금 느끼기에는 죽을 맛이지만, 사실 돌이켜서 큰 마음으로 보면, 한순간 감정이거든요. 그런 비유로 봤을 때, 내 마음속에 화를 진정으로 제어해야 돼요. 불자들 중에서도 화가 제어가 안 되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연세가 드시면 드실수록 몸에 힘이 빠지기 때문에, 에너지가 어디로 가냐면 1차적으로 입으로 갑니다. 입으로 와요. 그래서 입이 이제 걸어지는 거예요. 세지는 거에요.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그런 과정들이 있는 거예요. 젊을 때는 사람들이 잔소리 잘 안 합니다. 그런데 그 현재 에너지가, 입으로 간 에너지가 그 힘이 빠지면 마음으로 가요. 마음으로 가는 데 마음으로 더 고착되고, 더 달라붙어요. 그래서 자기 생각이 진짜인 줄 알아요. 자기 생각이 진짜일 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바로 자기에요. 왜냐하면 점점 객관적으로 그 생각들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힘들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화라고 하는 이 감정은, 그냥 몰려 올라온 이 화라는 것은 세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왜 화가 나느냐. 화를 어리석은 욕망이라 그랬어요. 첫 번째로는, 육체적인 쾌락, 육체적인 쾌락이 안 채워지면 화가 나요. 그래서 육체적인 쾌락을 채우면 화가 가라앉고 즐겁다고 말을 합니다. 행복하다고 말을 해요. 그런데 그 쾌락이 줄면 또 화가 나지요. 그래서 쾌락이라고 하는 거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없어요. 계속 커지는 겁니다. 그 욕망이라고 하는 게 커지니까 화가 더 나는 거죠. 두 번째로는 사견이에요. 사견은 삿된 견해란 말이에요. 정치적으로는 보수, 진보다 이렇게 자기 견해니까 잘못된 견해를 얘기할 수 있지만, 그런 것보다는, 그럼 사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견을 보면 되요. 정견은 뭐냐. 바른 생각인데, 바른 견해인데,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이 정견이에요. 즉 ‘세상은 영원하다, 내 것이 있다’라고 보는 건 사견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비유하자면, 그럼 정견은 뭐냐. ‘무상하다, 세상은 무아다’라고 보는 건 정견입니다. 삿된 견해를 설명을 하자면, 생각 차이예요. 생각 차이. 쉽게 우리 말로 표현하면 생각 차인데, 생각 차이 때문에 국토가 나눠지는 거거든요. 경전에 보면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생각 차이로 국토가 나눠진다. 국경이라고 하는 것은 문화적 차이나 언어적 차이나 이런 건 있지만 결국은 생각 차이로 국경이 생기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도 생각 차이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거예요. 생각 차이 때문에 이혼도 하는 겁니다. 이혼할 때,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뭐예요? 성격 차이에요. 성격 차이. 성격 차이는 뭐예요? 생각 차이잖아요. 그런데 왜 생각 차이로 그렇게 되느냐. 나와 다른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한테 왜 화가 나고 미워하게 되냐면 그 생각이 자기 생각이 되기 때문에, 자기와 동일시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상대방이 내 생각을 듣고 ‘너 생각은 틀려’라고 말하면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니까 끝없는 화가 나는 거죠. 나를 부정하니까. 그리고 세 번째로는 암안입니다. ‘나만 잘났어, 나만. 내가 옳아.’ 이 세 가지가 지금 말씀드렸던 욕망 중에서도, 크게 보면 다 욕망인데, 물질에 대한 욕망이죠. 그리고 쾌락에 대한 그리고 생각 다름에 대한 받아내지 못하는 마음. 그리고 나만 잘났어라고 하는 마음. 이 욕망과 사견과 그리고 암안이 화를 가져오는 세 가지 요소입니다. 이걸 해결해야 해요. 그래야 화가 줄어요. 이 화가 줄어야지만이 자기의 삶의 행복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할 때 자녀하고 이야기할 때 가족들하고 대화를 할 때, 이웃과 대화를 할 때, 동료와 대화 나눌 때, 이 화를 재워야 됩니다. 특히 자식에게 화를 낼 때 경험했을 거예요. 자기가 왜 화를 내는지 몰라요. 자녀들이 나중에 성장해서 보면 끝없이 화를 내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와 화를 내는 걸 알면서 화를 내는 부모 밑에서, 슬하에서 자란 자녀들의 마음 자리는 굉장히 다릅니다. 그리고 이 생에 와서 살다 보니, 또 이렇게 저렇게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 마음에 화라는 게 생겼어요. 다른 말로 화는 한이에요. 그런데 화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육체에 힘이 빠지면 우울 증세가 옵니다. 50대 중반, 60대 초반에 가면 제일 많이 오는 게 우울증이에요, 우울증. 그래서 젊을 때 그렇게 일에 쓸리고 저래 쓸리고 이래 화내고 저래 화 내가지고 늘 웃는 거보다는 인상을 쓰면서 내 삶은 왜 그런지 몰라.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지 몰라라고 토로한 사람들이 결국은 50대 60대에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런데 그 우울증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길게 겪은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치매올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은 연세 들어서 제일 무서운 게 치매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도 치매를 국가 책임제로 돌릴 정도로 지금 이 나라 치매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건강한 노년을 준비하고 계신, 그 건강한 노년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좀 더 가득가득 채워가기 위해서는 화를 내지 말아야 됩니다. 화내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백중 6재를 맞이해서 우리 부모님을 생각할 때, 우리 어머님을 생각하고, 우리 아버님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아버님은 살아생전에 화를 많이 내셨어. 우리 어머님은 화를 많이 내셨어. 혹여라도 그런 분이 계실까요. ‘우리 할아버지는 화를 많이 내셨던 분이야.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화가 많고 고집이 세셨어. ’라고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오늘 제사를 모시면서 그 마음 푸시라고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화를 한 번 내고 또 고집을 한 번 피고, 그랬던 마음들이 업이 되는 거예요. 그 업이 굴레 굴레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나쁜 갈래, 나쁜 갈래라고 하는 건 어둡고 추운 곳으로 가는 갈래에 빠질 수 있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음이에요, 어두운 거예요. 또 차가운 겁니다. 몸은 뜨겁고 마음은 뜨겁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 업은 점점 어두워지고 점점 차가워지는 거예요. 그러한 것을 내려놓고 지혜의 광명, 지혜 광명으로 내 마음을 돌리는 것은, 지혜는 맑고 밝은 거라고 그랬죠. 맑고 밝은 마음으로 돌려야지만이 내가, 내 스스로가 삶에서도 지금 이 순간 나쁜 갈래로 가지 않을 수 있고, 목숨을 다한 이후에 나쁜 갈래로 가지 않을 수가 있다라는 겁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3천 배를 하고, 옛날에는 절에서 3천 배 기도를 많이 했잖아요, 3천 배를 하고 문을 탁 열고 나갔는데 벗어놓은 신발이 안 보이는 거예요. 법당에 신도들이 가득 가득하니까 신발은 또 얼마나 많겠어요, 신발 두 개씩이니까. 신발 하나씩 신으면 좀 덜한데, 신발을 두 개씩 신고 다니잖아요. 신발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진관사엔 그런 일이 없죠.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가시겠지만, 옛날만 해도 그냥 뭐 벗어놓고 또 중간에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신발 이게 흐트러지잖아요. 신발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걸 보고 다리는 아프고 땀은 나고 그러니까 화를 딱 낸 거예요. 3천 배를 밤새 쫙 하고 무릎이 깨져라 하고 문을 딱 여는 순간 자기 신발이 안 보인다고 화를 딱 냈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3천 배 했던 마음, 그 마음을 잘 간직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보물을 잘 꺼냈어야 되는데 그 보물은 그냥 폐기 처분해버리고 지금 현상적으로 보이는 대상에 끌려가서 화를 내고 살아요. 이제 그러지 말자. 개인적으로는 화를 줄이고 그래서 개인의 업을 좀 줄여라. 공동체적으로는 우리의 공업이 이 다섯 가지를 함께 고민할 때는 나눔, 생명, 환경, 평화, 인권 이 5가지를 함께 고민하고 이제 우리 삶 속에서 녹여냅시다. 그리고 우리 불자들이 먼저 솔선 수범할 때가 됐어요. 그래야 이 땅에 또 다른 불교의 역사가 천 년이 열릴 것이고, 그 천 년은 지구를 살리고 우리의 삶을 살려서 만 년, 더 오랜 세월 부처님 이 땅에 함께 할것이다 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법담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